사이다 로판 추천: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 줄거리 요약
솔직히 저는 연재 중인 작품은 절대 안 본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완결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아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거든요. 그런데 『이번 생은 가주가 되겠습니다』는 어쩌다 클릭했다가 밤새 읽어버렸습니다. 나와 있는 화까지 다 읽고 나니 기다림에 지쳐서 자연스럽게 손을 놨다가, 완결 소식 듣고 "어? 이게 무슨 내용이었더라" 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총 2번은 읽은 것 같네요.
이 작품은 사생아로 태어난 피렌티아가 7살로 회귀해서 가문을 지키고 가주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입니다. 2019년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를 시작해 256화로 본편이 완결됐고, 이후 외전까지 나왔습니다(출처: 카카오페이지). 회귀물 특유의 사이다 전개와 똑똑한 여주인공이 매력적인 작품이죠.

회귀물의 정석, 하지만 로맨스는 천천히
제가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1화 구성이었습니다. 보통 회귀물은 주인공이 비참하게 죽고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달랐습니다. 첫 장면이 황제와 롤바르디 공작이 된 피렌티아가 파티에 입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 과거로 돌아가는 구성이죠.
피렌티아는 원래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 룰락 롬바르디가 살아계실 때 사업을 도왔고, 할아버지는 임종 직전 "네게 이만한 능력이 있는 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 가문을 네게 물려주었을 텐데"라며 후회했죠. 하지만 가주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고, 롬바르디는 쫄딱 망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비관하며 술을 마시다 마차에 치여 죽은 피렌티아는 눈을 떠보니 7살 어린아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회귀물(regression)의 전형적 구조를 따르면서도 독특한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회귀물이란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미래 지식을 활용해 운명을 바꾸는 서사 장르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초반부터 로맨스보다는 가문 경영과 정치 게임에 집중합니다. 여주인공 피렌티아가 아버지를 살리고,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고, 롬바르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계략을 펼치는 과정이 메인이에요. 2 황자 페레스와의 로맨스는 한참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점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더라고요. 로맨스를 기대하고 읽으면 초반에 좀 지루할 수 있습니다. 대신 정치극이나 가문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겁니다.
슈퍼우먼 여주, 그리고 고구마 없는 사이다 전개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실패 없는 여주인공'입니다. 피렌티아는 회귀 후 거의 모든 일을 성공시킵니다. 아버지도 살리고, 황태자도 구해주고, 자기 사업도 키우고, 사촌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죠. 전형적인 먼치킨물(overpowered protagonist) 구조입니다. 여기서 먼치킨물이란 주인공이 압도적인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를 뜻합니다.
솔직히 이건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장점은 읽는 내내 답답함이 없다는 거예요. 로맨스 판타지 독자들이 흔히 '고구마 구간'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이 억울하게 당하거나 오해받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피렌티아가 척척 해결해 버립니다. 한국 로맨스 판타지 독자들 사이에서 '사이다 전개'로 유명한 이유죠(출처: 소설넷).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갈등이 약하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져요. 제 경험상 이건 취향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다시 읽었으니 재미있게 본 편이지만, 주변에 이 소설 읽은 사람들 중엔 "너무 뻔하다", "여주가 완벽해서 감정이입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거든요.
특히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피렌티아의 능력치가 계속 상향되는 느낌이 듭니다. 경영 감각, 정치 수완, 심지어 차라 부족의 특수 능력까지 갖춰서 거의 무적 상태가 되죠. 차라 부족은 작중에서 남쪽 밀림에 사는 부족으로, '차라의 굴레'라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혈통입니다. 피렌티아는 이 혈통 덕분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었죠.
이런 설정이 흥미롭긴 한데, 동시에 "여주에게 너무 많은 걸 몰아준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문 경영 천재에 회귀 능력에 황자의 총애까지. 이쯤 되면 적이 없죠.
환생+회귀의 이중 구조, 그리고 독특한 세계관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엄밀히 말하면 '환생물'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피렌티아는 원래 현대 한국인이었다가 판타지 세계에 환생했고, 그 인생에서 실패한 뒤 다시 7살로 회귀한 거거든요. 환생물(reincarnation)이란 주인공이 죽은 뒤 다른 세계나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서사 장르를 말합니다.
그런데 환생 요소는 거의 활용되지 않습니다. 가끔 민트, 호랑이 연고, 고추장, 김치 같은 현대 한국 아이템이 언급되고, 택배 사업이나 병원 시스템을 도입하는 정도예요. 작가가 환생 설정을 넣은 이유는 아마도 서술의 편의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독자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설명하기 쉬우니까요.
세계관도 독특합니다. 이 작품의 무대인 램브루 제국에는 공작, 후작, 백작 같은 오등작(five peerage ranks) 제도가 없습니다. 여기서 오등작이란 유럽 귀족 사회의 작위 체계로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다섯 단계를 뜻하는데요,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쓰이는 설정이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작위 대신 '가문의 힘'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 롬바르디가 제국 최고 가문인 이유도 공작 작위가 아니라 경제력과 정치력 때문이에요.
다만 웹툰 58화에서 "저희는 일개 백작 가문일 뿐이랍니다"라는 대사가 나와서 독자들 사이에서 설정 오류 논란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동부 루만 가의 가신 가문"으로 수정됐다고 하네요. 이런 소소한 오류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세계관은 탄탄한 편입니다.
피렌티아가 가주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한마디로 '레드카펫이 깔린 고속도로'였습니다. 장애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주가 워낙 똑똑하고 준비가 철저해서 모든 문제를 술술 풀어나가죠. 이게 이 소설의 매력이자 한계입니다. 가볍게 읽기엔 정말 좋은데, 깊이 있는 감동이나 여운을 기대하긴 어렵거든요.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거든요. 주인공이 고생하고 억울해하는 걸 보는 게 아니라, 똑 부러지게 일 처리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시원했어요. 로맨스 판타지에 지친 분들,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다만 복잡한 갈등이나 입체적인 캐릭터를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