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에서 '스팸(Spam)'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기 반찬입니다. 노릇하게 구워 따뜻한 쌀밥에 올려 먹으면 그만한 밥도둑이 없고, 명절에는 서로 주고받는 인기 선물 세트 1순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스팸은 '맛있는 햄'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함을 열면 상황은 정반대로 바뀝니다. "스팸 메일함 비우기", "스팸 차단" 등 여기서 쓰이는 '스팸'은 불필요하고, 귀찮고, 삭제해 버려야 할 '쓰레기(Junk)' 취급을 받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짭짤하고 고소한 햄 통조림의 이름이 전 세계 네티즌이 혐오하는 '무차별 광고성 메일'의 이름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전쟁터의 식량에서 시작해 영국 코미디를 거쳐 인터넷 용어가 되기까지, 스팸의 파란만장한 3단 변신 과정을 소개합니다.

1. 1937년, 'Spiced Ham'의 탄생과 전쟁의 영웅
스팸의 역사는 1937년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의 식품 회사 '호멜(Hormel)'은 당시 잘 팔리지 않던 돼지고기 어깨살을 이용해 획기적인 통조림 햄을 개발했습니다. 이 신제품의 이름을 짓기 위해 사내 공모전을 열었고, 여기서 '양념 된 햄(SPiced hAM)'을 줄인 'SPAM'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습니다. (일설에는 'Shoulder of Pork and hAM'의 약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출시 초기 스팸은 저렴한 가격과 간편함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진짜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냉장 보관이 필요 없고 유통기한이 긴 스팸은 미군의 전투 식량으로 채택되어 전 세계 전장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연합군 병사들은 삼시 세끼 스팸만 먹어야 하는 상황에 질려버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팸은 굶주린 병사들과 전쟁 피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2.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의 '스팸, 스팸, 스팸...'
전쟁이 끝나고 1970년, 스팸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영국에서 일어납니다. 영국의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이 TV 쇼에서 선보인 스팸 관련 콩트(Sketch)가 그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식당에 부부가 들어와 메뉴를 주문하려는데, 식당의 모든 메뉴에 스팸이 들어가 있습니다. "계란과 스팸", "계란, 소시지와 스팸", "스팸, 계란, 스팸, 스팸..." 종업원은 끊임없이 "스팸"이라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급기야 식당 구석에 있던 바이킹 복장의 손님들이 합창하며 "스팸~ 스팸~ 사랑스러운 스팸~"이라는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합니다. 주인공 부부가 아무리 대화를 하려 해도 이 시끄러운 "스팸" 노랫소리에 묻혀 아무 말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코미디는 당시 값싼 싸구려 식재료로 취급받으며 어디에나 널려 있던 스팸을 풍자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원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다른 소통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존재'라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3. 인터넷 시대로 넘어온 골칫덩어리
1980년대와 90년대 초, 초기 인터넷 커뮤니티(유즈넷, MUD 게임 등)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채팅방이나 게시판에 의미 없는 글을 도배하거나, 같은 메시지를 무한 반복하여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트롤(Troll)들이 등장했습니다.
초창기 네티즌들은 이 모습이 마치 몬티 파이선 쇼에서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스팸 노래 합창"과 똑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런 도배 행위를 "스팸질 한다(Spamming)"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메일이 상용화되고,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광고 메일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쓰레기 메일들을 '스팸 메일(Spam Mail)'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햄 통조림 회사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지만, 이제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될 만큼 되돌릴 수 없는 공식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4. 마치며 : 햄은 죄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호멜 사가 처음에는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된다며 이 용어 사용을 반대했지만, 결국 대세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문자 SPAM은 맛있는 햄이고, 소문자 spam은 정크 메일이다"라고 재치 있게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햄이 전쟁터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고마운 식량에서, 영국 코미디언들의 장난감이 되었다가, 현대인의 골칫거리인 정크 메일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Spam'이라는 단어 속에는 지난 100년간 인류가 겪어온 전쟁과 문화, 그리고 기술의 변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메일함에 쌓인 스팸은 깨끗이 비워버리고, 따끈한 밥 위에 노릇하게 구운 스팸 한 조각을 올려 먹으며 이 흥미로운 어원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