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산을 맡기고 금융 거래를 하는 '은행(Bank)'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견고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높다란 빌딩, 두꺼운 금고문, 정장을 입은 직원들을 떠올리면 '안전함'이라는 단어가 절로 연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견고해 보이는 은행의 어원이 다름 아닌 시장바닥에 놓인 '나무 의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심지어 우리가 흔히 쓰는 '파산(Bankruptcy)'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 또한 이 의자를 때려 부수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어느 시장통, 낡은 탁자 위에서 시작된 은행(Bank)의 기원과 그 속에 담긴 신용의 역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이탈리아 환전상의 긴 의자, '반코(Banco)'
영어 단어 'Bank'의 유래를 찾기 위해서는 금융업이 막 꽃피우기 시작한 중세 이탈리아로 가야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각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북적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나라의 화폐가 오고 갔고, 이를 교환해 줄 '환전상'이 필수적인 직업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환전상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광장에 긴 탁자나 의자를 놓고 업무를 보았습니다. 이 긴 의자를 이탈리아어로 '반코(Banco)'라고 불렀습니다.
환전상들은 이 '반코' 위에 각국의 동전을 늘어놓고 무게를 달거나 환율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바꾸려면 반코(의자)로 가라"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점차 이 의자 자체가 금융 업무를 보는 장소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Banco'가 프랑스로 넘어가 'Banque'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영어의 'Bank'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2. 의자를 부수다 : 파산(Bankruptcy)의 충격적 유래
은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파산'입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파산했다"라고 말하는데, 영어로는 'Bankruptcy'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 또한 앞서 말씀드린 의자(Banco)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환전상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돈이 떨어지거나, 고객의 돈을 횡령하여 신용을 잃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게 된 환전상에게는 가혹하고 공개적인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바로 그가 장사를 하던 의자(Banco)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망치나 도끼로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부서짐'을 뜻하는 '로토(Rotto)'와 의자를 뜻하는 '반코(Banco)'가 합쳐져 '반코로토(Bancorotto)'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즉, "의자가 부서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의자가 부서졌다는 것은 다시는 그 시장에서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습니다. 이 'Bancorotto'가 오늘날의 'Bankruptcy(파산)'가 되었습니다.
3. 벤치에서 거대 금융 제국으로
초기의 은행은 시장 한구석의 초라한 의자에 불과했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그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이 바로 이 환전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교황까지 배출한 대표적인 가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화폐를 교환해 주는 것을 넘어, 돈을 맡아주고(예금), 빌려주는(대출) 현대적인 은행 시스템을 정착시켰습니다. 나무 의자였던 '반코'는 점차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로 바뀌었고, 오늘날 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공원에서 흔히 앉는 긴 의자 '벤치(Bench)' 역시 이 'Banco'와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공원의 벤치와 은행의 뱅크가 사실은 배다른 형제인 셈입니다.
4. 마치며 : 결국은 '신용(Credit)'의 문제
은행(Bank)의 어원을 살펴보면, 금융의 본질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거래의 투명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무 의자 하나 놓고 장사하던 시절, 환전상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의자가 아니라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신용'이었습니다. 신용을 잃는 순간, 그의 의자는 부서졌고 금융인으로서의 생명도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수억 원을 송금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의자(Banco)는 사라졌지만, 그 위에 놓여 있던 '신용'의 무게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러분이 거래하는 은행은 튼튼한가요? 혹시 우리 사회의 신용이라는 의자가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Bank'의 어원을 통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