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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다

by purevanillacookie 2026. 3. 5.

발해는 역사적으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한 나라인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발해라고 하면 KBS 드라마 대조영과 서태지의 노래 '발해를 꿈꾸며' 정도거든요. 문헌도 많지 않고 영토도 지금의 중국 땅이다 보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라이기도하죠.

668년,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거대 제국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한민족의 역사는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되는 듯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중국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고구려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698년, 고구려 출신의 장수 대조영은 흩어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만주 동모산 기슭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바로 '발해(渤海)'의 건국입니다. 이로써 한반도 남쪽에는 통일 신라가, 북쪽의 만주 벌판에는 발해가 자리 잡는 '남북국 시대(南北國 時代)'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당나라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나라를 세운 대조영의 서사부터, 훗날 중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해동성국)'라 칭송받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던 발해의 눈부신 발전과 그 역사적 의미를 심도 있게 조명합니다.

11.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다

천문령의 승리와 동모산에 피어난 고구려의 후예

고구려 멸망 후,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랴오시 영주(거란족, 말갈족 등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던 당나라의 변방) 지역으로 끌려가 억압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696년, 거란족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혼란해진 틈을 타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고향인 동쪽을 향해 거대한 탈출을 감행합니다. 당나라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고 거대한 추격군을 보냈습니다.

대조영은 험준한 지형인 '천문령'에서 당나라의 매서운 추격군을 상대로 매복 전술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천문령 전투의 승리로 마침내 당의 간섭에서 벗어난 대조영 무리는 698년, 지린성 둔화현의 동모산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처음 국호는 '진(震)'이었으나 훗날 '발해'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대조영(고왕)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했으며, 이는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 왕을 '고려(고구려) 국왕'이라 칭한 것에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잃어버렸던 만주의 드넓은 영토가 다시 우리 민족의 무대로 돌아온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무왕의 호기로운 선제공격과 문왕의 체제 정비

발해가 세워지자 흑수말갈과 당나라, 그리고 남쪽의 신라까지 발해를 견제하며 포위망을 좁혀왔습니다. 이에 제2대 무왕은 고구려의 맹장다운 기질을 발휘하여 호기롭게 맞섰습니다. 732년, 그는 장문휴가 이끄는 수군을 보내 당나라 산둥반도의 덩저우(등주)를 기습 선제공격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는 강력한 군사 강국임을 동아시아 전체에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무왕의 아들인 제3대 문왕 때에 이르러 발해는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장하고 국가 체제를 세련되게 다듬었습니다. 문왕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해만의 독자적인 정치 체제인 '3성 6부제'를 완성했습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하긴 했으나, 명칭은 충(忠)·인(仁)·의(義) 등 유교적 덕목을 사용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정당성 중심으로 운영하는 등 발해만의 독자성을 띠었습니다. 또한,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겨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황제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했습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영광과 융합의 문화

9세기 전반, 제10대 선왕에 이르러 발해는 최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영토는 서쪽으로 요동 지방을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연해주, 남쪽으로는 대동강 원산만 일대에서 신라와 국경을 맞댈 정도로 광활해졌습니다. 이는 과거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를 능가하는 크기였습니다. 지방 행정 구역을 '5경 15부 62주'로 완비한 발해의 압도적인 국력에 감탄한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 부르며 칭송했습니다.

발해의 사회 구조는 지배층의 대부분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의 대다수가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당의 문화를 융합하고, 말갈의 토속 문화를 포용하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경성 터에서 발견되는 온돌 장치, 고구려 양식을 그대로 빼닮은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그리고 웅장한 돌사자상 등은 발해가 고구려의 문화적 DNA를 완벽하게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웠음을 증명하는 훌륭한 유산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멸망, 그러나 이어지는 민족의 핏줄

동북아시아의 거대한 축이었던 발해는 926년,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갑작스러운 침략을 받고 불과 보름 만에 수도 상경성이 함락되며 허무하게 멸망하고 맙니다. 백두산 화산 폭발설부터 지배층의 내분설까지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존재하지만, 200년 넘게 찬란하게 빛났던 해동성국의 최후는 너무도 빠르고 비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역사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멸망 후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만 명의 발해 유민들은 남쪽의 새로운 통일 국가인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았고, 이는 신라의 불완전했던 통일을 넘어 고구려계(발해)와 삼한계(신라·백제)가 진정으로 하나로 융합되는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완성하는 거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훗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라는 책을 통해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명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당당히 품어 안음으로써, 광활했던 만주의 역사 역시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200년 넘게 만주를 호령했던 나라가 이렇게 잊힌다는 게 아쉽기도 해요. 그리고 생각해 보면 발해가 자리 잡았던 만주 지역에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잖아요. 어쩌면 그 후예들 중에 한민족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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