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현재, 뉴스를 틀면 심심치 않게 들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쇼비니즘(Chauvinism)'입니다. 주로 "국수주의(극단적 애국주의)"를 비판하거나, 특정 성별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남성 쇼비니즘(Male Chauvinism)"을 지적할 때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타당한 근거 없이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타 집단을 배척하는 태도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학적 용어가 사실은 19세기 프랑스의 한 늙고 병든 군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 그는 나폴레옹 황제를 위해서라면 심장이라도 꺼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충성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의 이름이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광신도'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일까요? 오늘은 단어 속에 숨겨진 프랑스 혁명기의 역사와 한 인간의 씁쓸한 몰락 과정을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1. 17번의 부상, 그리고 명예의 검: 영광의 시대
이야기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뒤흔들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로슈포르 출신의 니콜라 쇼뱅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과 황제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나폴레옹 군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랑 다르메(대육군)'의 일원으로서 가장 위험한 전장을 누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일부는 전설로 여겨지지만), 그는 복무 기간 동안 무려 17번의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어깨뼈가 으스러지고, 이마에는 씻을 수 없는 흉터가 남았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황제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직접 '명예의 검(Sabre of Honor)'과 적색 리본, 그리고 200프랑의 연금을 하사받습니다. 그에게 나폴레옹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혼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2. 멈춰버린 시계: 왕정복고와 "황제 폐하 만세"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고, 프랑스에는 다시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는 '왕정복고'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평화를 원했고, 나폴레옹을 '전쟁광'이라 비난하는 분위기마저 감돌았습니다.
하지만 늙고 불구가 된 쇼뱅의 시계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영광스러웠던 시절에 멈춰 있었습니다. 그는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습니다.
달라진 시대 상황과 사람들의 피로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그를 동정하던 이웃들도 점차 그를 부담스러워했고, 나중에는 '눈치 없고 앞뒤가 꽉 막힌 늙은이' 취급을 하며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3. 연극 무대 위에서 '박제'된 조롱거리
쇼뱅이 단순히 동네의 괴짜를 넘어 전 사회적인 조롱거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중문화였습니다. 1831년, 극작가 코냐르 형제(Cogniard brothers)는 <삼색 깃발(La Cocarde Tricolore)>이라는 보드빌(경음악극)을 무대에 올립니다.
이 연극에는 '니콜라 쇼뱅'이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는 남루한 군복을 입고 나와 뜬금없는 타이밍에 "프랑스 최고!", "나폴레옹 만세!"를 부르짖으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일삼습니다. 관객들은 현실 감각 없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쇼뱅을 보며 박장대소했습니다.
이 연극이 대히트를 치면서 '쇼뱅'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도자를 추종하거나, 맹목적인 애국심을 강요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런 쇼뱅 같은 놈(Chauvinist)"이라고 비꼬기 시작했습니다.
4. 국경을 넘어 의미의 확장: 국수주의에서 성차별까지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19세기 후반 영국으로 건너가 '징고이즘(Jingoism)'과 결합하며 '타국을 배척하는 호전적 애국주의'라는 뜻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며 그 의미는 다시 한번 거대하게 확장됩니다.
1960~70년대, 여성 인권 운동(페미니즘)이 활발해지면서 '남성 쇼비니즘(Male Chauvin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남성이 여성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편견을 가진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었습니다.
- 🌍 내셔널 쇼비니즘: "우리나라가 최고고, 다른 나라는 미개하다."
- 👨 남성 쇼비니즘: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
- 👴 세대 쇼비니즘: "요즘 젊은것들은 안 돼, 우리 때가 맞았어."
결국 오늘날 쇼비니즘의 본질은 애국심이 아닙니다.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과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바로 쇼비니즘의 진짜 얼굴입니다.
마치며: 니콜라 쇼뱅이 남긴 현대적 교훈
건강한 자부심과 맹목적인 우월감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 없이 "나만 옳다"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 누구나 제2의 니콜라 쇼뱅이 되어 무대 위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17번의 부상을 견뎌낸 그의 충성심이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비판적 사고'의 거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